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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의 역사
무안군 연혁
- 통일신라시대
- 경덕왕 16년 (757) : 무주의 무안군
- 고려시대
- 혜종 원년 (944) : 물량군
- 성종 10년 (991) : 나주목의 무안군
- 명종 2년 (1172) : 무안현
- 조선시대
- 태종 13년 (1413) : 전라도 무안현(현감)
- 고종 32년 (1895) : 나주부의 무안군
- 고종건양원년 (1896) : 전라도의 무안군
- 고종광무원년 (1897) : 무안부로 승격
- 일제강점기
- 1914. 03. 01 : 무안군 (목포부 분리)
- 1939. 04. 04 : 석곡면이 몽탄면으로 개칭
- 대한민국
- 1957. 11. 06 : 면성면을 무안면으로 개칭
- 1969. 01. 01 : 무안군에서 신안군이 분군
- 1979. 05. 01 : 무안읍 승격
- 1980. 12. 01 : 일로읍 승격
- 1983. 02. 15 : 운남면 승격 2읍 7면, 법정리 103, 행정리 399
- 2011. 01. 03 : 3읍 6면, 법정리 103, 행정리 399
- 2011. 08. 08 : 3읍 6면, 법정리 103, 행정리 416
무안군 역사
무안지역은 마한이 백제에 복속된 후 무안읍지역의 이름이 물아혜현(勿阿兮縣)으로 불리면서 구체적으로 역사기록에 등장하게 된다. 백제시대에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된 곳은 세 곳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무안읍 일대인 물아혜현이 무안군으로,신안군 압해면 지역인 아차산현(阿次山縣)이 압해군으로, 나주군 반남면 일대인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이 반남군이 되었다.신라의 삼국통일과 함께 물아혜현은 무진주에 속한 무안군으로 승격되면서 인접해 있던 여러 군현들을 그 예하에 거느리게 된다. 즉 통일신라시대의 무안군은 함풍현(함평),다지현(해제),진도현(진도 고군면)까지를 영속지로 관할하게 되었다.무안군의 규모가 현재의 그것보다 훨씬 크고 넓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강했던 무안의 세력판도는 통일신라 말 후삼국의 정립과 더불어 그 성격이 일단 변모하게 되자, 그것은 영역축소라는 현실로 나타난다. 즉 무안군이 통일신라시대에 누렸던 지위는 사실상 고대해로와 영산강이라는 지리적 배경에 연유한 것이며, 이 중요한 환경이 나말여초라고 하는 변혁기의 정치적 상황이 무안의 지위를 변모시키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무안은 많은 영속지가 나주나 영광에 귀속되고, 무안 일대의 직할지만을 영역으로 하는 축소된 행정범위를 가지면서 1018년 나주의 속군으로 전락하였다. 이때의 무안군의 판도는 해제 조차도 영광에 편입(해제임치는 영광군 염산면에)되었고, 현재의 무안읍.일로.몽탄.청계.현경.망운의 일부만 무안군에 소속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무안의 군호도 변하는데 944년(고려혜종원년)에 물량으로 바꾸었다가 991년(성종10년)에 다시 무안으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무안현에 처음으로 감무라고 불리우는 지방관이 파견된 것은 1172년(명종2년)에 이르러서였는데, 감무란 현령을 파견할 수 없는 작은 현의 감독관 같은 것이었다. 이후 무안에 현감이 파견된 것은 조선시대인 1413년(조선태종13년)에 이르러서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현감이 파견된 무안군은 세종때에 이르러 읍성이 완비되고 행정편제와 강역은 거의 한말까지 지속되었다. 다만 500년에 걸친 무안군의 영역이 현재의 무안지역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즉 인접한 함평군.영광군.나주목과 상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에 와서는 1895년 관제개혁 때 도서지방이 지도군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다가 1897년 10월에 목포진이 개항되어 이곳에 감리서가 설치되자 무안군도 부(府)로 승격되어 청사를 목포로 이전했다. 그러나 1910년 목포부로 바뀌면서 무안의 명칭이 없어졌다가 1914년 다시 분리하면서 목포부와 무안군으로 나누어졌다.
현대에 와서는 1969년 도서지방을 신안군으로 독립시켰으며, 1979년과 1980년에 무안면과 일로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2011년 삼향면이 삼향읍으로 승격되어 무안군은 3읍 6면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한편 이 시기에 무안의 군호도 변하는데 944년(고려혜종원년)에 물량으로 바꾸었다가 991년(성종10년)에 다시 무안으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무안현에 처음으로 감무라고 불리우는 지방관이 파견된 것은 1172년(명종2년)에 이르러서였는데, 감무란 현령을 파견할 수 없는 작은 현의 감독관 같은 것이었다. 이후 무안에 현감이 파견된 것은 조선시대인 1413년(조선태종13년)에 이르러서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현감이 파견된 무안군은 세종때에 이르러 읍성이 완비되고 행정편제와 강역은 거의 한말까지 지속되었다. 다만 500년에 걸친 무안군의 영역이 현재의 무안지역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즉 인접한 함평군.영광군.나주목과 상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에 와서는 1895년 관제개혁 때 도서지방이 지도군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다가 1897년 10월에 목포진이 개항되어 이곳에 감리서가 설치되자 무안군도 부(府)로 승격되어 청사를 목포로 이전했다. 그러나 1910년 목포부로 바뀌면서 무안의 명칭이 없어졌다가 1914년 다시 분리하면서 목포부와 무안군으로 나누어졌다.
현대에 와서는 1969년 도서지방을 신안군으로 독립시켰으며, 1979년과 1980년에 무안면과 일로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2011년 삼향면이 삼향읍으로 승격되어 무안군은 3읍 6면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무안군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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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화 : 국화
- 심한 서릿속에서도 오상 고절을 상징하는 꽃으로 군민의 기상과 일치 하며 관상용 다년생으로 어디에서나 생육이 잘 되고 무성하여 군민의 왕성한 의기를 나타내고 있다. 사군자의 하나로 이름높고 군자의 도리를 일깨워 주는 고결한 꽃으로서 우리 모두가 흠모하고 아끼는 꽃이며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온 꽃으로 우리 고장이 문화예술의 고장임을 표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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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목 : 느티나무
- 목질이 견고하고 질겨 군민의 강인한 의지와 끈기에 부합되며, 5월에 개화하여 추수기인 10월에 열매를 맺고 있어 곡창 무안을 상징하며 청계면 청천리의 느티나무 숲이 천연기념물 제82호로 지정관리되고 있어 군민에게 매우 친숙한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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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조 : 백로
- 나뭇가지위에 앉아있는 하얀 백로. 몸 전체가 흰빛깔로 청순미가 있어 백의를 숭상하는 우리의 전통성과 결백성 등 군민의 맑은 품성과 부합되고 정복력이 강하고 지기를 싫어하는 성정으로 안으로 숨겨져 있는 군민의 강한 투지를 나타내며 무안읍 상동마을에 4천여수가 서식하여 천연기념물 제211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백로가 서식하면서부터 경사가 많다하여 길조로서 군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무안군 캐릭터
마스코트는 무안군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활용도가 높고, 관공서와 일반대중, 군민과의 관계를 친숙하게 만들어 무안군의 이미지를 쉽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무안군의 마스코트는 '양파'와 영문이니셜 'M'을 단순, 의인화시켰으며, 첨단산업도시로서의 미래 지향성을 담고 있다. 마스코트는 구정홍보, 공공행정안내 지역상품 홍보, 각종 행사 외에 관광상품, 방문기념품 등 캐릭터 상품으로 개발할 수 있다. 마스코트의 활용은 재생용 원고를 이용한 사진복제방식이나 컴퓨터데이타를 이용한다.